십수년을 벼르고 별러 오던 것을 회장님의 강력한 추진력 덕분에 오늘 이렇게 친구들과 남해로 나들이 하는 날이다.
멀리 서울의 태균이 친구는 전날 경주에 도착해서 그곳 몇몇이와 포항의 재문이도 합세하여 전야제랍시고 제법 거나하게들 마셨나 보다
관광버스는 경주에서 8시에 출발하여 봉길 나아 울산을 경유 부산의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혜자와 향숙이가 준비해 온 김밥이며 전복죽과 더불어 돼지수육에 소주도 한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거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누군가 먹다 말고 자리를 뜬 사이 다 집어 삼키고 나면 흔적이 없어 질까 한 장 담아봤다.
밥빨인지 죽빨인지 아님 쇠주빨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게노이 자알 노온다. 유연하게---ㅎㅎ 누가 환갑다된 할매라 카겠노?
기사님께서 백천사에 대해 뭐라 말씀도 계셨는데 기억되는 게 하나도 없어 어디 소재하며 무슨 특징이 있는 사찰인지 통 몰따?
그래도 먹는 게 남는겐가? 때 되니 잘 찾아 먹는다. 봉길 친구들이 준비해 온 회무침으로 반찬 삼아 반주 삼아
오는 도중 버스내에서 부산의 성태 친구로부터 간단한 설명이 있은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히고 있단다. 부연 설명을 한다면 보리암은 금산 38경의 명소에 둘러싸여 있어 더욱 돋보이고. 위로 우람한 대장봉이 있고, 아래에 탑대가 받치고 있으며, 발치에 금산 제1의 명소 쌍홍문이 있다. 오른편에 화엄봉과 일월봉, 왼편에 삼불암이 늘어서 있고, 건너에 거대한 상사바위가 보인다.
'상사암' 안내 팻말 뒤의 넓적한 암부가 상사암으로, '한 머슴이 과수댁인 주인을 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어가게 되자 보다 못한 과수댁이 사람 없는 금산의 이 바위 벼랑 아래에서 원을 풀어주었다' 는 전설이 얽혀 있다.
보리암은 불교 남방전래설의 예가 되고 있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 되는 장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람하며 다니다 금산이 방광하듯 온 산이 빛나는 것을 보고 보광사를 짓고 산을 보광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보리암 앞 탑대 위에 있는 3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은 기이한 전설을 지니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바사석으로 김해 구지봉 아래 호계사에 세운 탑을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려고 원효대사가 이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후기 양식의 탑이라 한다. 이 탑이 신비스러운 것은 나침판을 놓으면 나침판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지 못하고 방황한다는 것이다. 밤에는 종종 이 탑이 빛에 싸인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내가 늦게 도착해 돌아 오는 친구들을 붙잡고 한 컷하다
흐린 날씨 탓에 산뜻하지는 않고 흐릿하지만 내려다 보니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그림 같은 상주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그 너머로 망망대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오는 길에 충렬사에 들러 보기로 했다. 이순신장군이 3개월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남아 있고 1598년11월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1599년 2월 11일 전라땅 고금도를 거쳐 외가동네인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하루 여정을 마무리하고 주린 배도 채우고 해단식 겸 충렬사 옆 대구횟집식당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다.
님들 기력도 대단들 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종일 비비고 흔들고 뛰시는 게---
항상 건간 유념하시어 기력 유지하는데 혼신을 다하여 후일 이런날 있으면 오늘 같기를 빌어 보며
아울러 함께한 친구들과 다른 일정과 여의치 못한 여러가지 사정으로 참석치 못한 우리 님들 모두의 가정과 일터에도 항상 행운이 가득 하시길 기원드리며 다음을 기약하며 몸관리에 철저를 기하시길 당부드립니다.
아래 친구처럼 가끔씩 피로하실땐 휴식도 취하는 걸 잊으시면 안됩니다.
피로엔 휴식만한 보약이 없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