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 있는 태백산맥의 남단에 위치하는 주왕산(721m)은 암벽으로 둘러싸인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石屛山 또는 周房山이라고도 하고.
1976년 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3년 10월 31일 명승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명칭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으로 막바지 여름의
피서지로 선정하여 아내와 두 번째로 찾아 보기로 한다.
주왕산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진나라에서 주왕이 이곳에 피신하여 왔다고 해서 붙은 것으로 산봉우리,
암굴마다 주왕의 전설이 얽혀 있다.
주왕과 마장군이 격전을 치렀다는 旗巖과,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 구경을 했다는 望月臺,
주왕산은 골이 깊고 지질이 우수하여 다양한 식물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송이버섯, 산철쭉(수달래 혹은 水丹化라 부른다) 등은 주왕산의 특산물로 유명하단다.
주왕이 숨어 살다가 죽었다는 周王窟 가는 방향.
동해가 바라다보이는 왕거암
주왕이 무기를 감추었다고 하는 무장굴(武藏窟)·연화굴(蓮花窟) 등이 있고,
천연 莓苔가 바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넘어질 듯 솟아오른 汲水臺,
연꽃 모양의 연화봉과 만화봉,
신선이 놀았다고 하는 신선대와 선녀탕, 폭포 등은 경승지로서의 가치를 갖추다.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고 내가 찾은 고릴라 바위
이렇게 산세가 웅장하고 기암절벽과 폭포가 많아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피서를 왔는데 찾아오는 이
별로 없어 사람 구경하기가 힘이들 정도로 조용하다
그리고 주왕암과 별바위에 이르는 13㎞의 숲은 여름 산행코스로도 유명하다는데
아내와 같이 걸어가는 것은 먼 거리라 무리다.
청학과 백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는 학소대(鶴巢臺),
학소교를 넘으려 할 때 하산하는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너무 조용하여 그야말로 寞寞窮山이다
조용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는 한줄기 흘린 땀을 시원하게 닦아주고
골짜기를 파고 들수록 景處임을 실감한다
갈라진 바위틈 사이로도 한 줄기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크다란 바위 덩어리는 물줄기에 시달려 온몸이 패이고 다듬어져
찾는 이에게 비길 데가 없이 자태를 뽐내고
제3폭포를 뒤로하고 주왕산을 찾아간다
잠시 쉬었다 가자하여 맑은 물에 발 담그고 빵을 먹는 아내와 이종
잠시 동안에 다슬기를 제법 잡았다
우리는 주왕산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골짜기 작은 물 길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걸음을 멈춘다
시원한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따르는 식솔들은 기진맥진이다
그러나 적송림이 너무 멋지다
혼자서 이 길을 오르락 내리락 반복을 하며 보조를 맞춘다
마침내 앞선 내가
주왕산 정상에 다다르다
오를 때와는 달리 모두들 밝은 기색이다
같은 자리에서 한 장 찍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다
눈 아래 바위틈 꼴자기를 따라 오르기 시작하여 이제 그곳을 바라보며 하산길에 접어든다
정말 멋진 명소로다
이제 내려가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한 고찰 大典寺를 비롯하여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白蓮庵도 찾아보려 한다
풍광에 젖어
더위를 잊은
피서지 주왕산은
또 하나의 추억거리 만들어 마슴속 깊이 새겨둠으로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하리라 자부한다
이윽고 대전사 도착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고.
672년(신라 문무왕 12) 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며,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惠勤이 붙였다고 하며,
또한 신라의 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고,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름
부속 암자로는 白蓮庵과 周王庵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 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음.
주왕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주방사로 추정되며,
나한전과 가학루·산령각 등이 남아 있고,
이 중 보광전은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으며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이다.
주요 건물로는 普光殿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과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음.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와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독대가 가지런하고 크고 작은 것 없이 모양이 일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뒤로 냉장고 같은 창고도 눈에 띈다
시장기를 감당하기 힘들어 동동주와 저녁을 다 먹어갈 즈음 한 장 찍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우린 시원한 계곡 한적한 곳을 찾아 목욕을 하고 가까운 마을 정자에서 좋은 꿈꾸며
내일을 기다리며 하루밤을 묵기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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