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行文◎

전주 새만금 채석강 그리고 지리산

milbori1999 2012. 2. 15. 17:26

집을 나서는 우리에게 만류하던 친구 부부를 뿌리치고 호남고속도를 달리다

충남 논산시 벌곡면 신양리 475 관내 벌곡휴게소 연못가에 호텔짓고 하루밤을 보낸다.

숙박비 걱정은 杞憂다  

아내가 밥 짓는 동안 주변을 살피니 연못안에는 잉어가 노닐고 그 옆에는 정자도 있다

자 오늘은 우선 전주한옥마을로 첫 발을 딛는다

전주는 900년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요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꽃피운 조선왕조의 발상지이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판소리의 본고장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가장 질 좋은 종이를 만들었던 한지의 본가다

전주한옥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한옥마을로서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한옥의 변천과정을 볼 수 있는 실제 주민거주공간이다

700여채의 한옥은 가장 한국적인 곳이라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일본인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의 자긍심이 작용한 결과로 탄생된 곳이라 들으니

感舊之懷가 남다르다

광광안내소에서 얻은 뚜벅이 지도를 들고

한옥마을의 시작인 태조로 길을 걸으며 좌우를 살피니 눈이 즐겁고

그 규모가 웅장하여

입이 절로 벌어지고 감탄사가 연발이다

요리조리 살피다 이윽고 다다른 경기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이 쯤에 다다르니 울산에서 이종 내외가 도착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경기전을 뒤로하고 이종 내외를 만나러 가기 전

이곳에서 그들을 만남

  

 

다시 뚜벅이지도를 펼치고 팔달로로 향하다

豊南門은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고,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옆면 3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란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란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으며.

풍패지관은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음.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하여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축소되었다.

셋은 객사 마루에서 쉬는 동안 혼자 밖을 나와 객사길을 걷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점심을 먹자고

전주하면 비빔밥

관광안내소 직원이 맛있는 집으로 가르쳐 준 가족회관 식당을 찾아간다.

반찬이 정갈하고 

비빔밥도 맛있게 보이나

썩 마음에 드는 맛은 아니다

콩나물을 꺼꾸로 재배한다니 머리는 성한지?

궁금하구나

 

식사 후 동문길을 걷다 우회하여 은행로를 따라 조용하고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날 반겨주는

물소리가 들린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실개천을 따라 흐른다.

본디 이곳에는 마을 가로질러 흐르는 맑은 물줄기가 있었단다.

'묵샘골'이라나

옛날 그 샘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 실줄기 물을 만들고, 다시 더 굵은 물줄기를 이어가며 그렇게 흘렀을

것이다.

 

본디 물은 제 몸을 낮추어 낮은 곳으로 흐르니, 그 겸허와 순리의 性情이 우리들의 마음에 오롯이 다가드는 美德이 되어준다.

산천이 아닌 도심에서 느리게 걷는 여로에 물길을 만남이 깜짝 반가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이 실개천에 몸과 마음 맡기니 바람 한줄기의 속삭임까지 느낄 수 있어 소중한 추억거리 쌓아 주는구나

 

자! 이제 바다바람이 싱그러운 새만금방조제로 추~울발

 

 

 

 

 

 

 

바다위의 만리장성이다.

새만금방조제는 전라북도 서해안에 갯벌바다를 땅으로 전환하는 간척 사업.

2007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새만금 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2010년 방조제를 완공하였으나 2020년까지 내부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방조제는 기존에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알려졌던 네덜란드자위더르 방조제(32.5km)보다

500m 긴 33km의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새만금방조제에서 옮겨 찾아 온 곳은 채석강.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채석강이라 한다.

절벽은 마치 10,000권의 책을 쌓아 올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색이 조화를 이룬다.

물이 불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는 추억거리가 많아 가만히 서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웃음이

저절로 터진다

물론 안식구와 고향친구 내외가 함께 만들고 쌓아 놓은 추억거리들이다.

 

이제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 호텔 짓고 하루밤을 묵을 생각을 해본다

이번 여행길에 늘 고생만 하는 고마운 동반자

車야! 달려라

먼길을 달려 당도한 곳 맑은 물에서 감자를 깍고 있는 아내

셋이서 밥을 짓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안 먹고는 못 배긴다 .

부산에서 오셨다는 분들이 피라미를 잡아 튀김을 만들어 한 접시를 건네준다

소주 한 잔에 안주로 먹으니

캬~아 죽여주는구나

마시는 술에 취하고, 흐르는 물소리에 취하고, 벌레와 같이 노래 부르다 밤하늘 처다보니 둥근달이 떠있네 저 달이 기울기 전 오늘 밤에는 잠 못 이룰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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