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行文◎

오죽헌 선교장 그리고 낙산사

milbori1999 2012. 2. 14. 10:13

문경새재 구경을 다하고 한적한 도로변에서 저녁밥 지어 먹고 하루밤 묵기를 청하니 겁많은 아내는

고속도로 휴게소로 가자하네

차선의 방법으로 원주에서 살고있는 친구(최상철과 김태균)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그것도

아내의 만류로 포기하고 중앙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평창휴게소에 늦은 시간에 당도하여

몸 닦고 하루밤을 보내다

우리 부부의 침실과 세간들이 알차다

길 나선지 3일차인 오늘은 먼저 오죽헌을 찾아 가기로 한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초기의 별당 또는 사랑채건축을 알 수 있는중요한 자료이라 한다

한옥을 배우고 익히고 일을 시작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주 찾아가는 곳이 절이나 고택들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柱心包樣式에서 二翼工樣式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율곡 선생의 어머니로 시, 글씨, 그림, 자수 등에 뛰어난 예술가 이자

효성 또한 지극해 우리나라 여성상을 대표하고 있다

 

이 御製閣은 정조임금이 1788년 율곡선생의 친필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고

책에는 머릿글을

벼루 뒷면에는 율곡선생의 학문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소중히 보관하라는 분부를 내리자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바깥채 건물은 주로 남자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율곡선생의 외할아버지

신명화, 아버지 이원수, 율곡선생의 이종사촌 권처균이 거처했던 곳이란다

 

 

시립박물관내 일상생활도구인 호롱 받침대와

기름틀인지 한약방용구인지 잘 모르겠다

금산리 고분 유적 발굴을 통하여 밝혀진

 

강릉지방의 횡굴식돌방무덤

 

 

 

 

이곳 오죽헌은 내가 처음 찾은 곳이다

구경은 마친 아내와 다음 장소인 선교장으로 향한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고

300년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강릉 선교장의 외부전경

活來亭을 배경을 하고 다소곳이 선교장 뒤산 홍송을 바라보는 아내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이곳은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함.

 

오나 가나 곳곳이 연꽃이다

내가 가면 꼭 그들을 만나게 되니 수레의 바퀴가 소를 따르듯하다

자 이제 낙산사로 가보자

'제23회 2018 평창동계올림픽' 대회년월일(2018년 2월 9일- 25일) 예정,
개최지 '대한미국 평창(2011년 7월 6일 24시) 발표 후 가는 곳마다 무료입장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이 창건하였다.  

858년(헌안왕 2) 범일()이 한 이후 몇 차례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소실된 건물들은 1953년에 다시 지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은 소실되었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부속건물인 臺앞에서 선 아내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낙산사 창건에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려 했던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하자,

바다 위에서 관음보살이 탄 붉은 연꽃이 솟아났다고 해서 홍련암이라 이름 지어졌다 한다.

에서 기도 드리는 法燈花 아내

들어 가보니 마루바닥 밑에 유리판을 깔아 놓았는데 까마득한 아래 바위틈 사이로

바밧물이 드나들고 있었음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이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삼척, 강릉, 고성을 휩쓴 큰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원통보전과 여러채의 전각이

소실되고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화마에 녹아버렸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홍련암에서 바라본 의상대

의상대에 앉은 우리 부부

우연히 이곳에서 옛 직장동료 부부를 만났다. 그가 우리에게 사진 찍기를 권하여 취한 포즈다

이름이 생각 나질 않아 미안한 맘이 들었는데

아직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님들 즐거운 여행시간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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